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1세 (문단 편집) === [[대북방전쟁]] === 1697년, 이웃 강국 [[스웨덴]]에서는 [[칼 11세]]가 병사하고 16살의 [[칼 12세]]가 즉위했다. 당연한 일로서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결국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재미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러시아인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던 [[보드카]]를 앞으로는 국가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 정부]]가 벌어들이는 세금의 40%는 보드카 판매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론 표트르 대제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지급해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병사들에게 보드카를 지급한다고 홍보하자 군 지원율이 상당히 높아졌다고도 한다.()] 1700년 [[러시아 제국군|루스 차르국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루스 차르국군은 약 3만 7천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루스 차르국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였으며, 패주하던 루스 차르국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명이 전사했지만 루스 차르국군은 9천여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문과 수만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루스 차르국군에 포위당했을 때, 루스 차르국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챘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루스 차르국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때 칼 12세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면 [[혼란 시대]]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고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작센 선제후국]]을 유린하는 사이 스웨덴령 [[잉그리아|잉에르만란드]]와 [[리보니아#s-3|스웨덴령 리보니아]]의 [[타르투|도르파트]], 나르바를 공격해 점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킨 칼 12세는 곧바로 표트르 1세를 위협했다. 표트르 1세는 그로드노[* 현 [[벨라루스]] [[흐로드나]].]에서 칼 12세와 소규모 병력끼리 맞붙었으나 쪽도 못쓰고 발려 점령한 잉에르만란드를 되돌려주고 나르바와 도르파트도 배상금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칼 12세는 새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스웨덴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정면으로 스웨덴군과 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표트르 1세는 [[청야전술]]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칼 12세도 [[스몰렌스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전통적인 최단 침공경로를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다. 표트르 1세는 길어진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고립시켰고, 결국 칼 12세가 부상당한 틈을 타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1세는 무리하게 [[몰다비아 공국]] 원정을 계획하다가 1710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하였고 추격해온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결국 병력을 보전하는 조건으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은 [[아조프]]를 반환했다. 이때 표트르는 임신한 자신의 정부(情婦)인 [[예카테리나 1세]]와 같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러시아 황제 부부가 나란히 [[동물원]] 우리에 갇힐 뻔했다. 거기다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칼 12세가 망명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만약 표트르가 포로로 잡혔다면 결코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이 아조프를 되찾은 것에 만족하고 대북방전쟁에서 빠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표트르는 연합군과 함께 계속해서 스웨덴을 밀어붙여 [[발트해]] 지역의 [[에스토니아 공국#s-2|스웨덴령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고 [[핀란드]] 전역을 유린했다.[* 이때 루스 차르국군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한 핀란드는 때마침 기근과 역병까지 덮치면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였다.] 노르웨이 침공 중 전사한 칼 12세의 뒤를 이은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와 협상한 끝에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과 핀란드의 [[비보르크|비보리]]와 [[프리오제르스크|켁스홀름]]을 포함한 [[카리알라]] 일부 지역을 얻으면서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를 얻어냈다. 스웨덴과의 일전과 승리는 표트르 1세의 대표적 업적이다. 본인도 이를 평생동안 자랑스러워했으며 승리를 기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페테르고프의 [[여름궁전]] 중심부에 [[삼손]]이 숫사자를 죽이는 모습을 조각한 분수를 만들어놓았다. 죽는 대상으로 숫사자를 선정한 이유는 스웨덴의 국장이 숫사자이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